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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15일 13:13 김고금평 에디터

상처받은 자만이 고립된 이를 위로할 수 있다

여자는 기억이 너무 또렷하고, 남자는 기억이 흐릿하다. 둘의 미세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여자는 과거의 기억을 선명하게 새기며 현재를 잊으며 살려고 하고, 남자는 과거의 기억을 뇌리 어느 곳에 저장한 채 현재의 일을 어쩔 수 없이 잊으며 살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기억'(메모리)을 공통 분모로 삼지만 여자는 '상처'를, 남자는 '치매'를 매개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두 사람의 삶은 모두 버겁다. 뉴욕의 타이어 공장 옆 허름한 아파트에서 딸과 함께 사는 실비아(제시카 채스테인)는 일부러 타인과 거리를 두는 생활로 스스로 고립시키고, 부유한 사울(피터 사스가드)은 치매로 인한 비의도적 차단으로 사회와 점점 고립된다.

두 사람이 비로소 고립에서 벗어난 계기는 고교 동창회를 통해서다. 실비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자, 처음 본 남자 사울이 한밤중 그녀를 집 앞까지 따라온 뒤 심지어 다음 날까지 비를 맞으며 기다린다.

영화 '메모리'는 타인에게 들키기 싫은 상처와 질병을 가진 남녀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뉴 오더' '썬다운' 등 전작에서 드러났듯, 미셸 프랑코 감독의 독특하고 이질적인 서사의 밑그림이 이번 첫 번째 사랑 영화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다소 충격적인 주인공의 기억과 이를 연결하는 관계는 한편으론 기존 다른 서사에서 흔히 보던 클리셰(진부한 설정)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무려 10년 넘게 금주하며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실비아가 견뎌온 '인고의 세월' 안에 갇힌 그녀의 상처들은 의도치 않게 치매로 남은 인생을 역시 인고의 세월로 보내야 하는 사울의 아픔을 보듬는 촉매로 어느 순간 작동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렇게 매 순간 어설프고 어리숙하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언어와 몸짓으로 소통하고 어루만진다.

상처받은 자만이 고립된 자를 위로할 수 있고, 홀로 내버려진 자만이 홀로 깊이 새겨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말 못 할 이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음을 영화는 넌지시 일러준다.

상처가 만든 강박은 실비아의 삶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한다. 사울의 삶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다. 속도도 다르지만, 앞으로의 방향도 알 수 없다. 이들의 인생은 현재도, 미래도 가늠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지금 맺고 있는 관계의,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줄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의 서사를 받쳐주는 유일한 곡이 영국 밴드 프로콜 하럼의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A Whiter Shade of Pale)이다. 곡 자체도 영화의 서사만큼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매하고 모호하다.

가사는 어떤 얘기를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밴드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악기가 오르간이라는 사실도 특이하다. 사울은 이 노래를 실비아에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이 오르간은 남부 교회에서 쓰던 거예요. (죽은) 아내가 너무 좋아해서 저 거실 한쪽에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노래에서 가장 인상적인 극적인 순간을 거실 중앙에 채우려는 것처럼, 이들의 사랑도 가장 극적인 순간에 머무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고립을 겪어야 했던 사울도, 사랑에 울컥하던 실비아도 모두 가장 아픈 순간에 이 노래를 '기억의 가장 중심'에 놓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2일 개봉. 104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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